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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기록(정리중)>

뭘 해주려 하는 마음을 버린 오후

뭘 해주려 하는 마음을 버린 오후

 

오후 217. 그 시간이 다가오면 저는 고민을 시작합니다. ‘아이가 하원하면 같이 뭐하지?아이가 저녁 먹기까지 네 시간 남짓 시간을 둘이서 어떻게 보낼까를 골똘히 궁리하는데요. 이 때 느낌은 조금은 압박이 있습니다. 오전 내내 일했던 저도 피곤하면 피곤한지라 뭘 새로 해 주기가 부담스러운 것이죠. 그래서 오늘도 아이가 하원하면 실내 놀이터에 아는 친구네 가족하고 같이 가서 놀리려 했어요. 밥도 사 먹이고 겸사겸사. 그런데 아이가 다가올 때 즈음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비 때문인지 제 몸도 천근만근이더군요. 최근에 일을 많이 했거든요. 내일 새벽에 출장도 있구요. 그래서 마음을 비우고, 그냥 집에서 놀아야지 싶었습니다. 약속 취소 연락도 하고요.

 

아이가 왔고, 비는 억수같이 내렸습니다. 준비해 간 비옷을 둘러 입히니 아이가 말합니다. ‘슈퍼가서 간식 사고 싶어.’ 저는 그 소리에 별 판단 없이, 그래 그러자하며 함께 갑니다. 저는 노랑믹스커피 한 통 고르는 동안 아이는 초코픽을 고릅니다. 속으로 저거 찍어먹는 거 마음에 안 드는데 싶지만 비도 오고 이런 날도 있어야지 싶어서 그래라 하고 둡니다. 둘이서 비가 많이 오는 길을 걷습니다. 아이 발이 커서 장화가 작아 오늘 운동화를 신고 갔는데, 물웅덩이에 굳이 들어가서 발을 담그고 첨벙 거립니다. 하지 말라고 하고 싶지만 그래 그래라 하고 또 둡니다. 즐거워합니다. 빵빵 터집니다. 길을 건너 집에 들어오는 길 아이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습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아이 신발을 벗겨 그대로 화장실로 보냅니다. 욕조에 물을 받고 아이를 담그고 저도 씻고 아이도 씻습니다. 뽀얗게 수증기가 찬 욕실에서 둘이 물에 몸을 담그고 이래저래 이야길 합니다. 아이가 좋아하는 터닝메카드 노래를 흥얼거립니다. 갑자기 그 노래 가사가 궁금하더군요. 몸 닦고 같이 나와 스케치북을 꺼내서 그 가사 전체를 적어 내려가 봅니다. 그리고 같이 불러봅니다. 아이가 좋아합니다. 한참 즐거워하는데, 아이가 제가 강의할 때 쓰는 견출지를 들고 나옵니다. 당장 엄마 일할 때 쓰는 거니까 안 돼 하려다가 그냥 그럼 한 세트만 써 하고 주니 아이가 막 웃으면서 그 견출지를 제 눈과 코와 입에 붙입니다. 저는 괴물인 척합니다. 아이가 막 웃습니다. 자지러집니다. 견출지에 눈코입을 그려서 아이 얼굴에도 붙이고 제 얼굴에도 붙이며 노는데 그거 하는 데만 한 시간을 놀았습니다. 마구 웃었습니다. 쌀을 안치고 카레를 하려 밑작업을 하는데 아이가 옆에서 블록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부엌에 라디오가 흐르고 빗소리가 들리고 아이와 고요하게 한 공간에 무엇을 애써 하려 하지 않고있는 대로 있어보았습니다. 참 좋더군요.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오랜만에 되새깁니다. 뭘 그래 해 주려고 했던가, 그냥 같이 있어도 좋은 것을. 굳이 무엇을 하려 했던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그저 함께 있음의 좋음에 집중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