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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기록(정리중)>

[셀프코칭 | 희소식] 호시절(好時節) 입니다

 

 

“아니, 더운 데. 입기 싫어.”하며 투덜대는 아들 녀석에게, 저는 천연덕스럽게 연기하며 “이거 안 입으면, 에취이~ 하며 바람에 날아간다.” 말하며, 제 몸은 어느 덧 날아가는 몸동작을 하고 있습니다. 입기 싫지만 엄마가 웃겨주는 통에 어느 새 아들 녀석의 고집은 한 풀 꺾이고, 그렇게 오늘 아침 등원길은 우리 둘의 웃음소리로 가득 찹니다. 이렇게 작은 아들과 마주보며 깔깔 대는 이 순간이, 제 전체 삶에서 단연코 최고의 순간일 것입니다.

 

가을입니다. 아니, 가을이 ‘왔습니다’라고 표현하고 싶네요. 짧은 옷들에 익숙해졌던 나날들이 저물고, 긴 팔에 손이 주춤 가도록 날이 서늘해졌습니다. 노란 버스에 아이를 태워 보내고 나서 가을 아침의 선선한 바람이 좋아 슬리퍼를 끌고 그대로 집 앞 카페로 향했습니다. 마침 집에 원두도 다 떨어졌으니 사올 겸 말이지요. 우리 집에서 카페로 가는 데는 대학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게 제일 빠릅니다. 그렇게 저는 집 앞 대학 캠퍼스 내를 거닐며 바닥에 뒹구는 낙엽도 보고, 바삐 1교시를 향해 걸어가는 대학생들도 보았습니다. 그 중에 어여삐 정장에 화장을 곱게 한 학생들이 눈에 띄었지요. 졸업을 앞둔 그들은 사진을 찍고 있더군요. 교내 곳곳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20대 초중반 학생들이 참 어여쁘다 생각하며 거닐었습니다. 캠퍼스 내 벤치에 앉아 있는 중년남성분들도 보았지요. 한차례 운동을 끝낸 그들의 쉼이 참 고즈넉해 보였습니다. 그렇게 학교 정문에 다 이를 때 쯤, 제 마음에 ‘아, 호 시절이다.’란 문장이 스며들었습니다.

 

호(好) 시절(時節), 좋은 나날들. 아침에 눈을 떠, 사랑하는 이와 웃으며 인사 나눌 수 있고, 날이 좋아 슬리퍼 끌고 원두를 사러 갈 수 있는. 두 다리가 건강한, 아픈 곳이 없는. 무언가 꼭 해야 할 일에 시달리지도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로 적지만 돈을 벌 수 있는. 세수도 안 해 놓고서 너무 수척할까 싶어 붉은 립밤만 대충 발라놓고서도 그런 자신의 모습에 그저 초연하게 길을 걸을 수 있는, 마음에 큰 근심이 없는. 너무 먼 미래에 두려워하지 않고, 이미 지나간 과거에 잡혀있지 않는. 변해가는 나뭇잎의 색에 감탄하고, 한 송이 피어난 들꽃의 아름다움에 감탄할 수 있는. 적당한 청춘의 나이에, 적당한 도전과제가 있어 해쳐 나가볼 장면들이 있는. 그런 그 세수도 안 하고 원두를 사러 나선 저는 참 꽤 괜찮은 나날을 지금 보내고 있구나란 생각이 가슴에 깊이 와 닿았습니다. ‘아, 나 지금 굉장히 호시절을 보내고 있구나.’ 혼자 연거푸 중얼거렸지요.

 

그렇게 카페에 도착하여 늘 사 먹던 ‘디카페인 하우스 원두’를 고르려던 차에 아래 바구니에 ‘가을 스페셜 원두’가 제게 손을 흔들더군요. ‘저에요. 저. 오늘은 카페인이 좀 있더라도 저를 좀 만나봐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한참을 고민하다가 일상의 ‘호시절’을 알아차린 오늘이 왠지 모르게 좋은 기념으로, ‘가을 스페셜 원두’로 집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 핸드드립커피를 곱게 내려 지금 제가 애정하는 녹색 스탠리 보온병에 담아 호로록 마시며 가을에 머무르려 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지만, 저 혼자 그럴 수 있음 자체에도 무척 만족하며.

 

호시절이라 말했지만, 막상 이렇게 노트북 앞에 커피와 함께 출근하고 나니 할 일이 산더미 같군요. 그럴 땐, 제 프로젝트 2019(하반기 ver) 명 “그므시라꼬”를 외쳐봅니다. 일단, 이렇게 매일 아침 업무 시작 전 그 무슨 내용이든 ‘글쓰기 습관’ 길들이기를 시작했고요. 늘 요가만 하던 제 몸에 문화센터 ‘발레’를 오늘 시켜볼 예정입니다. 다녀와서는 밀린 원고를 작성할 거고요. 빨래도 개고, 블로그에 몇 개의 일과 관련된 고지를 할 예정입니다. 그러다보면 아이가 오겠지요. 너무나 할 일들이 잘 예상되고, 그 장면에 제가 어떤 모습일지 이미 알 것 같지만, 오늘 만난 단어 ‘호시절’을 가슴에 품어보렵니다. 이렇게 내가 할 일이 있고, 그 일을 할 건강이 내게 있으며, 내가 귀가할 공간이 있고, 내게 소중한 가족이 있는 그 가장 평범한 호시절을 가슴에 기억하며 오늘을 보내보려 합니다. 오늘 그대의 하루에도 작은 호시절이 있기를, 그리고 작은 호시절을 너머 더 확장되어가는 호시절이 일상에 가득 차시길 멀리서 바랍니다.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